서울에서 중고 컴퓨터 장사를 하던 부부에게 늦은 저녁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를 위해 중고 컴퓨터를 구입하고 싶다고 했죠. 엄마는 전화를 끊기 전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내 집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지방에 살아요. 딸은 서울에서 할머니와 둘이 살고요.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서….”
엄마는 말을 채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전화를 받은 남편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며칠 뒤, 남편은 컴퓨터를 설치해주기 위해 아이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낡은 건물이 가득 들어찬 동네, 그 중에서도 아주 작고 허름한 집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하셨습니다. 한 눈에 봐도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죠.
컴퓨터 설치가 끝나갈 무렵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컴퓨터를 보더니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습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엄마가 너 공부 열심히 하라고 사준거야. 학원 다녀와서 실컷해”라며 아이를 학원에 보냈죠.
남편이 설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정류장에 서 있는 아이가 보였습니다. 학원까지 태워다주겠노라 호의를 베풀자 아이는 덥석 “하계역까지 태워다주세요”하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10분쯤 지났을까. 아이가 갑자기 내려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막무가내로 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대로변에 아이를 내려주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차에서 내린 뒤 “기다리지 말고 아저씨 먼저 가세요”라며 근처 건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기다리자는 마음에 차에서 내려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를 봤습니다. 남편은 그 순간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보조석 시트에 검붉은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첫 생리’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트에 새어나올 정도면 당연히 바지에 묻었을 테고, 당장 처리할 물건은 없을 테고, 형편을 봤을 때 휴대폰이 있을 리 만무하고….
속옷가게를 찾았습니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정을 들은 아내는 바로 오겠다며 전화를 황급히 끊고는 생리대, 속옷, 물티슈, 치마 등 지금 당장 필요할 물품을 구비해왔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들어갔을 것으로 보이는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아가 어디에 있니? 난 아까 컴퓨터 아저씨 부인이야”
그러자 닫혀있던 문 안 쪽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혼자 소리 없이 울고 있었던 겁니다. 아내를 마주한 아이는 처음에는 멋쩍게 웃더니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놓자 그제야 목 놓아 울었습니다. 아내는 괜찮다고, 아줌마가 다 해주겠다고 아이를 달랬습니다.
그 시각, 차에서 아내 연락만을 기다리던 남편에게 메시지 한 통이 왔습니다.
“5분 뒤에 나갈게. 얼른 뛰어가 꽃 한 다발 사와”
남편은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꽃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는 보통 딸이 생리를 시작하면 아빠가 꽃다발을 사주는 거라고 설명해주었죠. 아이는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으니, 그 역할을 남편이 해주길 바랐던 겁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아내와 아이가 걸어 나왔습니다.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팅팅 부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얼굴에도 눈물 자국이 보였습니다.
아이를 집에 데려다 준 뒤 남편은 봉투에 10만원을 넣어 “아까 컴퓨터 값 계산이 잘못됐다”며 할머니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참, 길지만 꽉 찬 하루였습니다.
그날 늦은 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이 엄마였습니다. 엄마는 울고 있었습니다. 오늘 일을 전해들은 모양입니다. 아무 말 없이 흐느끼기만 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 “고맙다”는 말이 들어있었을 겁니다.
아낌없이 성의를 베푼 것은 이들 부부였는데, 정작 그들은 아이에게서, 아이의 엄마에게서, 또 아이의 할머니에게서 더 많은 걸 얻었다고 말합니다. 간절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 또 그들의 소리 없는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는 따뜻한 이들. 여전히 우리는 참 살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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