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jpg 참고
조회수 : 12 | 등록일 : 2023.12.18 (월)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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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아이콘 보미랑나연 | 등록된 오늘의 한마디가 없습니다.


23일 아침 당머리를 떠나 논잠포로 가려고 했다.


아버지가 혹시 논잠포에 계시는가 생각되어서였다. 


 





다 안개가 자욱한 속에 문득 배 한 척이 돌연히 날아오자 


뱃사람들이 왜선이 온다고 외치므로 나는 사로잡힘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벗고 물 속에 뛰어버리자, 


집안 처자 형제와 한 배의 남녀가 거의 반 이상이 함께 물에 빠졌다. 


그런데 배 매는 언덕이어서 물이 얕아, 적이 장대로 끌어내어 일제히 포박하여 세워 놓았다. 


 


오직 김주천 형제와 노비 10여 명이 언덕에 올라 달아나서 모면되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형님의 위패는 둘째 형이 안고 물 속에 떨어졌는데, 끌어내는 사이에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돌아가신 모친과 살아계신 부친을 섬겨보려던 뜻이 한꺼번에 다하고 말았다.


 





어린아이 용이와 첩의 딸 애생을 모래 밭에 버려 두었는데, 조수가 밀려 떠내려가느라 우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니 한참만에야 끊어졌다. 


나는 나이가 30세에 비로소 이 아이를 얻었는데, 태몽에 새끼 용이 물 위에 뜬 것을 보았으므로 드디어 이름을 용이라 지었던 것이다. 


누가 그 아이가 물에 빠져 죽으리라 생각했겠는가? 


 


부생(浮生)의 온갖 일이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다. 


왜적이 내가 타고 가던 배를 저희들 배의 꼬리에 달고 바람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는데 배가 살과 같이 빨랐다.


 





24일 무안현의 한 해곡에 당도하니,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 


무슨 마음으로 낳았으며, 무슨 죄로 죽는 것인가? 


나는 평생에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이 많은데도, 이때만은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배가 물 따라 그대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왜적 하나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너희 수로대장(水路大將 이순신 장군)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태안 안행량에 있는데, 배들이 해마다 표류되고 난파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좋게 지은것인데, 대개 수로의 천험(天險)이 된다. 


그러므로 명나라 장수인 소(召)ㆍ고(顧) 두 유격(遊擊)이 수만 척을 거느리고 내려오는데, 


이미 군산포에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는 수가 모자라서 물러섰지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서는 이리 저리 서로 쳐다보더니 개중에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는 놈도 있었다.


 


 





나는 가만히 통역에게, 나를 잡아가는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예주수(伊豫州守) 좌도(佐渡)의 부곡(部曲) 신칠랑(信七郞)이라는 자라고 했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예하 부대인 오즈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


 


밤에 장인께서 몰래 결박을 풀어 주시기에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 들어가자, 적의 무리는 떼를 지어 소리를 치며 즉시 끌어내었다. 


이 때문에 나의 집안 식구를 더욱 단단히 얽어매서 동아줄이 살 속을 파고 들어가서 손등이 모두 갈라지고 터져서 끝내 큰 종기가 되었다. 


그래서 3년을 지나도록 굽히고 펴지를 못했으며 오른손에는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통역에게 묻기를,


“적이 어째서 우리들을 죽이지 아니하느냐?”


하니, 통역이 대답하기를,


“공 등이 사립(絲笠)을 쓰고 명주 옷을 입었으므로 관인(官人)이라고 생각하여 포박하여 


일본에 송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엄하게 경계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였다.


 


 


3일이 지나자 왜적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누가 바로 정처(正妻)이냐?“


하니, 부인들이 다 자수하자 왜선으로 몰아 올라가게 하고, 나의 형제를 옮겨서 실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너희들을 죽일 것이다.”


하였다. 나의 첩ㆍ처조부 및 큰형수ㆍ비자(婢子) 10명과 처부의 서제매 등을 혹은 나누어 싣기도 하고 정말 살해하기도 했다. 


 


슬프도다! 맏형이 돌아가실 적에 말문이 어둔하여 종이를 빌려 기록하신 말이 있다.


“네가 있으니 나는 잊고 간다. 형수를 부탁한다.”


하였는데, 누가 갑자기 이 지경을 당할 줄이야 생각했겠는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나 역시 목숨이 어느 때까지 붙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처지였다. 


노비들도 나를 버리고 달아난 자는 모두 목숨을 도생했고, 상전을 연연하여 차마 가지 못한 자는 모두 살해를 당했으니, 


이 역시 슬픈 일일 따름이었다.


 




 


(명나라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에 나오는 순천왜성 그림 )


 


이윽고 여러 왜가 많은 배를 발동하여 남으로 내려갔는데, 


영산창 우수영을 지나서 순천 왜교에 당도했다. 


이곳에는 판축(板築)이 이미 갖추어 해안에다 성을 쌓아 위로 은하수에까지 맞닿을 정도였다. 


배들은 모두 줄지어 정박해 있었는데, 유독 부인(俘人 사로잡힌 사람)들이 탄 배 백여 척만은 모두 바다 가운데 떠 있었다. 


대개 포로되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9일 동안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죽지 아니하니 진실로 목숨이 모진 모양이다. 


뒤에 오는 남녀는 태반이 친구집 가족들이었는데, 양우상 집안이 참몰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날 왜녀가 밥 한 사발씩을 사람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뉘도 제대로 벗기지 아니했고 모래가 반을 차지했고, 생선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뱃사람들은 배가 하도 고파서 깨끗이 씻어 말려서 요기를 했다. 


 


 




 


밤중에 옆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옥을 쪼개는 듯하였다. 


나는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두 눈이 말라 붙었는데, 이날 밤에는 옷소매가 다 젖었다. 


따라서 시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죽지사(竹枝詞) 노래 / 何處竹枝詞


밤조차 삼경인데 달도 하얗도다 / 三更月白時


이웃 배가 모두 눈물짓는데 / 隣船皆下淚


가장 젖은 건 초신의 옷이로다 / 最濕楚臣衣


 


이튿날에 한 척의 적의 배가 옆을 스쳐가는데 어떤 여자가 급히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영광 사람 없소?’ 하고 부르므로, 


둘째 형수씨가 나가 물으니, 바로 애생의 어미였다. 서로 갈린 후로 소식을 몰라 벌써 죽었거니 생각했는데,


아직 안 죽고 살았다니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굶어 죽고야 말았다.


 


그이가 천만 가지로 슬피 하소연하는 것을 귀로는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이날 밤부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왜노가 아무리 때려도 그치지 않더니 밥을 먹지 아니하고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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