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를 공부할 때 모르면 사소하게 혼란스러운 3가지 요소
조회수 : 12 | 등록일 : 2023.02.01 (수)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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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아이콘 보미랑나연 | 등록된 오늘의 한마디가 없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고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현대의 양상과는 조금 다른 구도로 진행되는 경우가 있음.




역사를 충분히 아는 사람들이라면야 헷갈릴 일이 없겠지만

누구든 항상 초심자 시절은 있을 테고,




그리하여, 역사를 공부하는 초심자들이 알아두면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3가지 요소들이 있음.







1. 중앙집권화의 정도





한 나라의 군주가 본인이 직접 다스리는 수도 지역을 제외한 지방에

얼마만큼의 통제력을 투사하는지의 역량 정도가 바로 중앙집권화의 정도임.





전세계의 모든 고대사, 중세사는

군주가 휘하 영토의 기득권 세력들이 지니고 있던 토착 권력을 빼앗아 오는 과정임.




 

백제 멸망 당시에도 의자왕이 백제 전역의 군권을 총괄한 게 아니라

마한 지역 호족들에게도 군사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식으로 전쟁이 진행되었고








 


고려도 건국 기준으로 지방 호족들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비교적 빠르게 건국 정국을 안정시켰음.









하물며 일본도 대정봉환 - 무진전쟁 - 메이지 유신을 거치기 전까지

사실상 중앙의 막부와 지방의 다이묘들이 아슬아슬한 협력을 해 나가는 구도였고,

이런 봉건적 성격이 지금까지도 일본 정치계에 일부 남아 있는 상황임.










한국사에서 현대인이 공감할 만한 수준의 중앙집권을 이룬 국가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중앙 정부에서 임금이 시켰을 때 지방 정부에서 '넵!' 하고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한 국가는


조선밖에 없었음을 인지하고 한국사 공부를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듯함. 

















2. 세력 범위와 국경


21세기의 한국인들이야 국경의 이미지가 휴전선과 철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니만큼

국경의 권위가 상당히 크게 다가오겠지만,



 

전체적인 역사를 통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국경과 세력 범위가 엄밀하게 구분되는 시대가 생각보다는 짧음.








그나마 농경민족들의 경우는 농경지의 경계가 생계수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경계를 긋고 니 땅 내 땅 구분이라도 했음.



 

물론, 이 경우에도 니 땅과 내 땅이 꼭 상린한다는 보장은 없음.

'빈 땅'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는 말.

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산지는 '빈 땅'으로 간주되었음.













 
그나마도 '땅에 귀속된, 노력에 비례한 산출물'이 주요 생계수단이 아닌 비농경민족들의 경우,

계절에 따라 음식이 나오는 곳으로 이주를 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보니

이 땅이 계속해서 니 땅일 필요도, 내 땅일 필요도 없는 지경에 이름.

이번 여름에는 잡초가 더 무성한 땅으로 말들 밥 먹이러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다 보니 힘 센 외부 세력이 오면 그때 그때 청기 백기 들듯 그 나라 간판만 달아 주는 상황도 있었음.







 

고구려의 영토 비정에서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는데, 

누가 보더라도 농경사회인 두만-압록강 이남과 요동 반도까지는 확실한 비정이 가능하지만






사실상 유목민 사회였던 만주 지역은

어느 부족이 언제까지 고구려 간판을 달고 있었는지,

그 부족 중에서 몇 명 정도가 고구려 간판을 달고 있었는지,

고구려 간판을 달고 있던 부족이 언제까지 그 동네에 살고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비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문제가 생김.







이러한 문제는 비단 고구려만의 문제는 아니고,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음.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의 북부 국경은 사실상 고고학자들의 주관적인 추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고구려가 유독 백제나 신라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큰 영토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한국사 공부를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듯함.














3. 역사적 사료



위의 두 문제를 온전하고 속시원하게 해결할 수가 없게 된 이유가 바로 역사적 사료가 부족해서임.

현존하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임.






첫째로, 지식을 전승할 만한 문자 체계의 보유 여부

둘째로, 지식을 전승할 만한 수준의 사회적 밀집 여부

셋째로, 그러한 역사적 사료가 운좋게 현대까지 전해졌는지의 여부








그러니까 우리가 역사적 사료로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사회에서 문자 체계를 가지고 '책'의 개념을 만들 수 있어야 함.

구전으로도 지식을 전승할 수는 있지만, 문자 자료에 비해 효율은 극도로 떨어짐.

그리고 그 '책'을 생산할 정도의 잉여생산력은 보유한 사회여야 함.

먹고 사는 게 시급한 사회라면 응당 책 쓸 시간에 밥 벌어먹어야 하기 때문.







여기까지는 어지간한 '이름 있는 국가'라면 다 할 수 있음.

그 사료가 지금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조건이 가장 맞추기 힘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서도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모두 전해지지는 않음.








고려의 역사서로는 '고려실록'과 '고려사'가 있는데,

'고려실록'은 고려 시대에 남긴 역사적 기록이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며 화재로 완전히 소실됨.

'고려사'는 조선 건국 이후 편찬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고려실록'만큼의 신빙성을 지니지는 못함.












 

조선의 역사서로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지방에다가 백업을 철저히 해 뒀고,

그 덕분에 백업본을 여기저기서 수없이 날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승이 되었다.

대충 그 과정이 어떠했냐면







원래 한양에 원본이 있고, 충주, 전주, 성주에 백업을 해 두는 구조였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주 백업본만 안의, 손홍록이라는 두 유생이 개인 사재를 털어 내장산으로 옮겨서 간신히 살아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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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부터는 실록을 산으로 옮기는 게 안전하겠다 싶어서

한양에다가 복원본을 두고,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 백업을 해 두는 구조로 바뀜.





 
근데 한양 복원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또 소실됨.

또 침략당할까 봐 마니산 백업본은 정족산으로 옮겼고, 묘향산 백업본은 적상산으로 옮겼음.







정족산 백업본과 태백산 백업본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됨.
한국 전쟁 때는 기차에 실려 부산까지 내려감. 이후 현재에 이름.

적상산 백업본은 일제강점기에 창경원 장서각으로 이관됨.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이 북한에 점령된 후, 어찌저찌 북한으로 올라가 버림. 이후 현재에 이름.





오대산 백업본은 일제강점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이관됨.


 
하지만 한국 전쟁은커녕 관동대지진을 정통으로 맞아 사실상 전부 소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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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 우리에게 전해지기까지의 과정만 보더라도,

우여곡절이 참 이래저래 많았다고 느낄 수 있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공부하는 기준으로 '조선은 참 역사가 많다'의 관점이 아니라

'조선은 참 운 좋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역사서가 많다'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한국사 공부를 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듯함.











3줄 요약

1. 옛날에는 임금이 시켜도 밑에서 눈치 보면서 잘 안 따랐음.

2. 유목민족들은 주변 눈치 보면서 국가 간판으로 청기백기함.

3. 조선왕조실록은 어케 지금까지 버텼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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