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이르기를
“서양 선박은 매우 불측하다.”
하자,
김병학이 아뢰기를
“정황이 불측한 것으로 양이洋夷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른바 미리견彌利堅은 부락만 있을 뿐인데,
그 중간에 화성돈華盛頓이라는 곳者이 있어서 성지城池를 만들고 기지를 건설하여 해외의 양이洋夷와 더불어 서로 교통하고 있으며,
영국은 거리상 가장 가까운 듯하니
이는 <해국도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해적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그들이 경영하는 것은 오직 이익만을 좇는 것인데
바닷섬 사이를 오가면서 또한 겁탈하는 버릇도 많으니, 과연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들이 소위 교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해괴한 말입니다.
저들이 비록 이런 구실로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일체 엄격히 막은 뒤에야 나라가 나라의 체모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종은 다짜고자 미국을 해적 같다고 비난하고 있으며,
영의정 김병학은 미국이 부락으로만 이뤄져 있고, 워싱턴이라는 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렇게만 보면
'19세기 말 대체 어떻게 이런 폐쇄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지...'
라고 하면서 조선 말기의 '후진성'에 분노 혹은 한탄하기 쉽다
그러나 해국도지 원문을 참고하여 해당 승정원일기 기사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다.
임금께서 영의정 김병학에게 말씀하셨다.
“서양 선박은 그 의도가 괘씸하다.”
영의정이 임금께 말씀을 올렸다.
“맞습니다. 이른바 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미국은 주(State)로만 이뤄져 있는데,
워싱턴이라는 자가 나라의 기틀을 다진 뒤, 해외의 서양 오랑캐들과 서로 교통하고 있습니다.
영국이 거리상 가장 가까운 듯한데, 이는 모두 해국도지에 근거합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그자들은 해적과 다름이 없다.”
영의정이 말씀을 올렸다.
“미국인들은 오직 자본의 이익만을 보고 움직입니다.
바닷섬 사이를 오가면서 약탈하는 버릇도 자주 보였으니, 과연 해적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교역을 위해 왔다는 자의 말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해괴한 말입니다.
저들이 이러한 구실을 들고 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일체 엄격히 막은 뒤에야 조선의 국격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영의정 김병학은 기존의 인식에 비해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인식과 별개로 김병학이 쇄국을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오해는 '부락'과 '화성돈'이라는 두 키워드 때문에 발생하는데,
김병학이 인용한 해국도지에 따르면
미리견彌利堅(America) 대륙의 육내사질育奈士迭(United States)은
사질士迭(State) 26곳과 달리다리達厘多裏(Territory) 2곳, 그리고 수도인 저사특리底士特力(District)로 이뤄져 있다.
사질은 중국의 대부락大部落에 해당하며, 사질 안에 각각의 강저사岡底士(County)가 있는데 이는 중국의 소부락小部落에 해당한다.
수도는 화성돈華盛頓(Washington)이라고도 불리는데,
수도가 없을 때 영길리英吉利(England)에 맞서 싸웠고, 이때 화성돈이 크게 활약했기에 그의 이름을 빌어 수도의 명칭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미국이 부락으로 이뤄져 있으며,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국가가 아니라
미국이 26개 주로 이뤄져 있으며, 조지 워싱턴이 기틀을 다진 국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근데, 왜 고종은 뜬금없이 미국 보고 해적이라고 비난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