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 여진 오도리족의 추장이었던 먼터무는 청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로 훗날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로 추숭받는 인물임.
흥미로운 것은 그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등의 이름으로 기록되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기 전부터 그의 측근으로서 전장을 누볐고, 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고 자기 입으로 말함.
[1]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 12월 14일 계묘 2번째기사
동북면 1도(道)는 원래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킨 땅으로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을 생각한 지 오래 되어,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 먼 데서 오고, 이란 두만(移闌豆漫)도 모두 와서 태조를 섬기었으되, 언제나 활과 칼을 차고 잠저(潛邸)에 들어와서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었고, 동정(東征)·서벌(西伐)할 때에도 따라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진(女眞)은 알타리 두만(斡朶里豆漫) 협온 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 ~ (중략) ~ 등이 이것이다.
임금이 즉위한 뒤에 적당히 만호(萬戶)와 천호(千戶)의 벼슬을 주고, 이두란(李豆闌)을 시켜서 여진을 초안(招安)하여 ~ (중략) ~ 야인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덕을 생각하고, 변장들과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하면 태조 때 일을 말하고 감읍(感泣)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2] 세종실록 20권, 세종 5년 6월 24일 계유 3번째기사
건주 좌위(建州左衛) 지휘(指揮)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경원부(慶源府)에 이첩한 관문(關文)에 말하기를,
"(중략) 내가 직업이 없어서 젊었을 때에 태조(太祖)의 부르심을 받아 농우(農牛)·농기(農器)·양료(糧料)·의복(衣服)을 주며, ‘아목하(阿木河)에서 거주하라.’ 하였으므로 이제 6월 초2일 관하(管下) 백성 5백 23호를 거느리고 아목하(阿木河, 함경도 회령)로 돌아왔으니, 식량을 주어 살도록 하여 주소서."
[3]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윤7월 1일 무술 1번째기사
맹가첩목아가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태조(太祖)를 따를 때에 후한 은혜를 특히 입었는데 중간에는 실례한 것이 많았습니다. 또 전하의 깊은 은덕을 입어서 소인만의 목숨을 살렸을 뿐 아니라, 관하(管下)가 오직 혜택을 입어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옵니다.’ 하면서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말마디마다 정이 넘쳤습니다.
[4]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3월 6일 갑인 2번째기사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와 그 아비 동 휘호(童揮護)와 그 아우 범찰(凡察) 등은 그대로 본국의 공험진 이남 경성(鏡城) 아목하(阿木河) 지방에 사옵던 중, 신의 조부 선신 강헌왕(康獻王, 태조 이성계) 아무개 때에 윗항의 맹가첩목아가 우적합(亐狄哈)에게 가재 등물을 침탈당하여 그 부속 인민이 도망가 흩어져서 스스로 존립하지 못하므로, 신의 조부께서 불쌍하게 여기어 본인에게 경성(鏡城) 등처의 만호 관직을 제수하고 공해(公廨)를 지어주며, 면전(面前)에서 거리치[牢子] 등 사환하는 인구와 안마(鞍馬)·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어서 위무하여 편하게 하여 주었고, 신의 부친(조선 태종) 때에는 승진시켜 상장군(上將軍) 3품 관직을 제수하여 호적에 붙이게 하였으며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더니, 그 후에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그대로 본국 군민과 서로 섞여 살기를 신의 조부 때부터 신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성계와 그가 세운 조선의 신하로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치던 먼터무의 7대손인 청태종에게 이성계의 10대손인 인조가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치게 된 역사가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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