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정종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은 자신의 형이었던 이방과를 세자로 추대하였는데
이방과는 “정안공(이방원)이 하시지요”라고 사양하다가 결국 세자 자리를 받아들임
그런데 혹자는 이때 이방원이 잠시 후, 형의 양보로 2대 왕이 될 계획이었다고도 하는데 지금부터 후술할 글은 그 관점에서 바라본 당시 상황임
이 내용은 정설이나 학계 대다수가 인정하는 내용은 아니며, 역사의 다의성 속에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며 읽으면 좋을 것 같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방원은 곧 형의 양보를 받아 자신이 세자가 되고 2대 왕으로 즉위하고자 했음
그러나 그 속셈을 눈치챈 태조 이성계에 의해 계획이 시작부터 틀어지게 되는데
바로 이성계가 바로 양위를 해버리면서, 이방과가 2대 왕으로 즉위를 해버린 것....
물론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었지만 이제 어떻게 해도 즉위과정이 이뻐보이기에는 무리가 있게 되었음
그래서 선택한 것이 2대 왕인 이방과의 흔적 지우기
2차 왕자의 난을 전후로 이방원이 후계자로 공식화 되는 과정에서 그는 이상한 고집을 피우는데
바로 자신을 ‘세자’로 책봉해달라는 것.
좌우 신하들은 “임금의 형제이시니 왕세제가 되셔야지, 왕세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만류하는데
이방원은 끝까지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되겠다고 우기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결국 형인 이방과는 “허면 내가 동생을 아들처럼 여기면 되지 않겠는가!”하면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함
그러나 사실 이방원은 형인 이방과의 아들이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서 세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었음
즉 형인 2대 왕이 없었고, 자신이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서 왕세자가 되어 2대왕으로 남고자 했던 것
즉 기록상으로 이렇게 남길 원했던 것으로 보임
(1) 태조 이성계 건국 및 즉위
(2) 형의 존재 지우기
(3)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
(4) 이방원이 2대 왕으로 즉위
물론 이방원은 왕이 된 이후에도 형인 이방과를 상왕의 예로 깍듯하게 대접했고, 말년에는 같이 격구도 하고 사냥도 다니며 사이도 좋았는데
문제는 세종 원년에 이방과가 죽고 나서 발생했음
왕에게 응당 올려야 할 시호와 묘호를 생략하거나 축소한 것.
그래서 이방과는 태조, 태종, 세종과 같은 묘호도 받지 못하고, 시호 역시 다른 왕들은 최소 8글자를 받을 때 이방과는 4글자(온인 순효 대왕溫仁順孝大王)밖에 받지 못함
즉 정식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
거기다가 이방원 사후 태종이라는 묘호를 쓰는데, 태종은 일반적으로 2대왕에게 올리는 묘호라는 점에서 태종의 의도가 엿보임
즉 태종 이방원은 형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이 태조 이성계를 계승한 2대 왕으로 남고 싶었던 것
이후 세종은 용비어천가를 지으면서도 ‘해동육룡’을 이야기 하면서 2대 왕이었던 이방과를 생략해버림
즉 세종 입장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고려하였던 것인데, 세종은 2대왕 이방과를 조선의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임시 권한대행 정도로 취급했던 것
종묘에도 모시기는 모시는데 제일 안 좋은 자리에 고정으로 박아버림
결국 이방과는 정식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정대왕 정도로 불리다가
262년이 지난 숙종대에 이르러
“공정대왕이 겸손한 뜻으로 물러나셨기에 태종과 세종께서도 그 뜻을 받들어 묘호를 안 올렸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분들도 공정대왕이 묘호가 없으심을 불편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요?”
라는 논리로 ‘정종’이라는 묘호를 올림
결국 태종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어차피 치적과 아들찬스로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크게 상관 없을지도
댓글 작성 (0/1000) 비밀글 (체크하시면 운영자와 글 작성자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