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폭주한 공민왕, 사실일까?
조회수 : 8 | 등록일 : 2023.03.18 (토) 20:10

프로필사진
레벨아이콘 감추사가자 | 등록된 오늘의 한마디가 없습니다.





원나라에 각을 세우던 공민왕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


김용의 사병들이 흥왕사로 처들어와 공민왕을 죽이려 할 당시, 밀실의 입구를 몸으로 막아 공민왕을 구한 것도 그녀다.


이처럼 끈끈했던 부부관계는, 노국대장공주가 출산을 하다 죽으면서 끊어진다.


공민왕으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후 멘붕한 공민왕은 정사를 요승 신돈에게 맡기고 그로서 나라는 멸망의 단계에 치닫게 되며.... 가 대중의 공민왕 후기 치세의 인식인듯하다.


그런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까지 권력강화의 떡밥을 굴린 정치동물 공민왕이, 아내의 죽음 하나로 사람이 무너졌다는 것이 사실일까?


공민왕과 신돈의 치세를 자세히 보면 이상한 점이 보인다.




1. 노국대장공주의 죽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년 2월, 출산 중 죽고 만다. 바로 이 해에 신돈에게 권력이 위임되기 때문에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전횡을 연결시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이 이전 1~2년간을 보면, 노국대장공주만 죽은 것이 아니다.



1363년 윤3월, 김용이 흥왕사로 처들어와 공민왕을 죽이려 하다 실패한다. 정황상 김용은 기황후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363년 3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덕흥군을 국왕에 앉히려고 시도한다.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에 대가리 박고 정삭을 요구하며 연호를 받아 사대복속관계로 회귀하려 시도한다.


6월, 공민왕의 필사적인 도게자에도 불구하고 사신 이가노가 국경을 넘어와 폐위교서를 반포한다. 이에 공민왕은 전국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고 급히 공신들을 책정하여 신하들을 회유하려 시도한다.


1364년 1월, 덕흥군과 최유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처들어온다. 공민왕의 군대는 필사적으로 싸워 간신히 승리한다(이와중에도 숙청빔을 날려 여러 장수들이 의심을 받아 처형된다). 덕흥군과 최유는 포기하지 않고 요동에서 2차 원정을 준비한다.


1364년 4월, 공민왕의 장인이자 노국대장공주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위왕 보루 테무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도를 장악, 기황후의 측근들을 제거한다.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도주한다.


1364년 10월,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복위시킨다. 11월에는 최유가 고려에서 압송되어 처형된다.


1365년 3월, 기황후가 (이제서야) 관아에 유폐되고 위왕이 정권을 장악한다. 


1365년 6월, 기황후가 환궁한다. 지방으로 도주한 아유시리다라와 군벌 쾌쾌 테무르가 연계한다.  


1365년 7월, *보루 테무르가 기황후의 반격을 받아 실각, 처형된다. 공민왕은 10월 경 이 사실을 알게된다.



타임라인을 보면, 기철 이후 원나라발 최대의 위기 사태이다.


더 이상 공민왕 못봐주겠다는 기황후의 분노 속에 결국 폐위조서가 날아오고, 내부에서는 측근이 기황후와 편먹어 반란, 왕을 죽이기 직전까지 간다. 


필사적인 똥꼬쇼에도 대립왕의 1만대군이 몰려와서 간신히 막아냈고, 장인어른이 정권잡아 활로가 열리나 했더니 정권도 제대로 못잡고 역공당해 죽어버린다. 노국대장공주마저 죽어버리며 원나라와의 모든 끈이 끊어져버린다.



* 반역자 보루 테무르가 공민왕의 장인인 위왕과 동일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데 나는 동일인물이라고 봄

집권후 친고려적 무빙을 보였기도 하고(이부분은 그냥 기황후랑 반대로 가다보니 벌어진 걸수도 있음), 동시대 정권을 위협할 정도의 강자 보루 테무르가 2명이 존재했다는 것도 좀 억지같아서....


공민왕 장인이 1353년에 죽었다는 설은 걍 낭설이라 봄. 내가 알기로 이 설 출처가 하안참 뒤 중화민국 시절에나 나온 신원사인데 고려사에는 1370년에 노국공주의 아버지인 위왕이 죽었다고 조회 쉰 기록 있음



다 뒈져가는 원나라가 뭐가 두렵다고 공민왕이 쩔쩔매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것이다.


일단, 원나라도 다 뒈져가는건 맞다. 하지만 다 뒈져가는건 고려도 마찬가지다. 홍건적이 수도를 쓸고 간지 3년도 안됐고 왜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더군다나, 원칙상 공민왕은 원나라의 신하이다. 왕위의 정통성이 원나라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원나라가 폐위빔을 날릴 경우 이를 명분으로 제 2,3의 김용들이 들고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원나라같은 좆같은 애들이 폐위교서를 날렸다 한들 거기 부화뇌동하는 매국노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사구팽을 좀 적당히 했어야지. 신하들의 충성심, 애국심을 믿기에는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쌓은 업보가 좀 많았다.


원나라는 분명 망하기 직전이었지만, 여전히 제국이었다. 변방 약소국 국왕의 모가지 하나정도는 충분히 날리고 갈 수 있었다.



바로 이 시점, 1365년 5월, 신돈이 왕사로 임명받고 국정자문을 시작한다



2. 신돈의 이상한 행적



신돈이 자문을 시작하자마자 처음 한 일은, 바로 대규모 숙청극이었다.


가장 먼저 찬성사 최영과 수시중 경천흥이 날아간다. 사유는 사냥을 성대하게 했다는 것이다.

연저수종공신이자 기철제거공신이었던 목인길 역시 유배당했다.


그해 말까지 27명의 측근과 중신들이 유배되거나 면직된다. 오직 분위기를 파악한 유숙만이 재빠르게 낙향함으로서 신돈의 마수를 (일단) 피한다(살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음해 5월,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창설하고 자신이 판사가 되어 권세가들이 독점한 토지와 노비를 되돌리는 '개혁'을 단행한다.


주인을 벗어난 노비와 토지를 되돌려받은 백성들은 신돈을 성인으로 여겼다



1368년 12월, 신돈은 최측근인 이춘부, 이인임을 시중으로 밀어넣는데 성공한다. 신돈 정권의 절정기였다.


1369년 2월, 신돈은 5도의 도사심관 자리를 요구한다.


사심관은 태조 왕건 시절 지방을 모조리 통제할 수 없으므로 지방 호족을 사심관으로 둔 것이다. 불가피하게 토착이권을 인정해준것에 가까운 것이다.


토착이권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 호족이 아닌 신돈이 사심관, 그것도 5도의 사심관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지방행정을 장악하겠다는 소리다. 너무나 무모한 요구였고 당연히 거부된다. 이후 공민왕과 신돈은 불편한 사이가 된다.


1369년 8월, 천도하자는 신돈의 주장에 대해 공민왕이 반대를 표시한다.


1369년 11월, 신돈의 측근 승려 고인기가 신돈의 역모를 누설한다. 신돈은 급히 이를 해명하고 고인기를 금강산으로 추방한다.


1371년 3월, 신돈이 군사를 매복시켜 공민왕을 죽이려 했으나 빈틈이 없어 실패한다.


1371년 7월, 신돈이 실각, 주살된다. 신돈과 함께 주살된 자가 30명이고 유배당한 자가 20명이며, 이 중 기씨가 5명이고 부원배 신순, 신귀 또한 있었다.



무엇이 이상한가?


일단, 어느 간신이더라도 신입 시절엔 사리면서 시작하는 법이다. 자기 위에 왕이라는 절대권력자를 둔 이상 눈치를 보 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승려라는 출신을 생각하면, 첫 스타트를 공민왕의 핵심 측근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빔으로 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이다.


두번째로, 갑작스레 5도 사심관 자리를 요구한 것이다. 사심관 제도의 취지를 생각해볼 때 신돈은 그 자리를 요구할 아무 정당성이 없었다. 신돈의 요구는, 공민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지방세력을 꾸리고 싶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무모한 요구였다.


마지막으로, 공민왕에 대해 이빨 부득부득 갈고 있을 기씨일파 잔당, 부원배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뜻이다. 공민왕의 숙청 이후 세력이 크게 약해졌을 기씨가 숙청자 명단의 무려 1/6을 차지한다.



이쯤되면 의문이 든다. 왕의 핵심 측근들을 공격하고, 왕의 권력기반을 노리며, 왕의 원수들과 친하게 지낸다.


공민왕은 왜 얘를 두고봄? 얘 어떻게 정권을 유지함?



3. 신돈 - 원나라와 공민왕의 사냥개



1363~1365년간 이어진 원나라vs공민왕의 파워게임에서 양자는 한 가지를 깨닫는다.


이 이상 전면전으로 부딪치면, 쌍방이 공멸할 가능성이 높다. 더 이상의 기싸움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을 말이다.


원나라는 당장 반란을 막아야 하는데(못막음) 고려에까지 할애할 힘이 없고, 공민왕은 원나라가 아무리 쇠망했다 한들 자기 하나 끌고 논개하는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다.



타협의 필요성을 느낀 양쪽은 새로운 적을 찾아낸다.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공 등 여러 변란을 거치면서 성장한, 공민왕의 최측근들이다.


취약한 왕권과 여러 전란 속에서 공민왕은 자기 최측근들에게 온갖 이권과 벼슬을 퍼주었고, 친위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측근들의 사병 육성 역시 장려했다.


1363년쯤 가면 이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 공민왕조차 위협을 느꼈다(당장 김용의 사병이 공민왕을 죽이기 직전까지 갔다)



물론 공민왕은 이들을 직접 손볼 생각은 없었다. 


공민왕과 원나라의 파워밸런스가 아슬아슬하게 맞춰져 있는 상황에서 공민왕이 대대적으로 숙청극을 찍으며 신하들의 인심을 더 이상 잃을 경우, 원나라가 다시 개입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칼잡이' - 왕 외에는 의존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존 호족들과 유리되어 있으면서, 왕 대신 어그로를 끌어줬다 일 끝나면 숙청해버려도 뒤탈없는 칼잡이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사이비 승려 같은 애들 말이다.



이렇게 정권을 잡은 신돈은 개백정처럼 공민왕 측근들의 모가지를 날리며 충성을 다한다. 겸사겸사 기씨일파와 부원배 대우도 좀 해주며 원나라 입맛도 맞춰줬다.


원나라도 신돈의 집권을 반기며, 집현전 대학사직을 내리고 술과 음식을 보내 답례한다.



원나라+공민왕의 미묘한 균형 속에 집권한 신돈은, 바로 이 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몰락한다.


1368년 9월, 원나라 수도 대도가 함락당하며 원나라가 북방으로 쫓겨간 것이었다. 비록 기씨일족인 기사인테무르가 조정 따라 초원으로 가는 대신 요동에 머물며 공민왕에게 압박을 넣고 있었으나(신돈 정권이 대도 함락 이후 2년 정도 더 존속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원나라가 좆망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1369년 12월, 공민왕은 사신으로 온 북원의 병부상서 노은과 친원 성향을 띄던 관리들을 처단하며 원나라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분명히 했다



이제 공민왕은 원나라 눈치를 볼 이유가 없다. 그리고 공신 숙청 역시 충분히 했다. 신돈의 용도가 끝난 것이다.



공민왕의 행적을 볼 때, 신돈의 운명은 누구나 예측가능했다. 

결국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ㅊㅊ- https://www.fmkorea.com/best/5593400905 

댓글 작성 (0/1000) 비밀글 (체크하시면 운영자와 글 작성자만 볼 수 있습니다)

0개의 댓글과 0답글이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