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여포군의 인간 흉기 고순에 대한 추측
조회수 : 17 | 등록일 : 2023.04.04 (화) 15:04

프로필사진
레벨아이콘 동부신도시 | 등록된 오늘의 한마디가 없습니다.





 

고순(高順)
(? ~ 198)

 

.활약


- 196 6여포의 장수 학맹의 반란 제압 여포전

약탈한 장패를 공격하려는 여포에게 공격하지 말라고 조언 여포전

- 198 장료와 함께 유비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유비의 처자식 생포 – 선주전(유비)

유비를 지원하러 온 조조군의 하후돈 격파 – 무제기(조조)

 

삼국지 초반부에 엄청난 활약을 한 명장이지만

삼국지 후반부까지 활약을 하지 못하다 보니 자세한 기록이 없다 보니

고순의 고향은 어디인지여포군의 언제 합류했고합류 전에 어디서 뭘 했는지,

맹목적으로 여포를 따른 이유 라던지조조는 왜 장료와 같은 여포의 수하들은

다 받아줬어도 왜 고순은 죽였고 고순도 항복을 원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어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고순에 대해 추측해 보자

 

◈ 고순은 언제 여포군의 합류 했는가.

 

1. 병주에서부터 장료,위속 등과 함께 여포군 합류

 

2. 왕윤,여포가 동탁을 제거하고 중앙군의 병권을 이양 받으면서 여포군 합류

 

3. 이각,곽사에게 패배 후 하내의 장양에게 의탁했을 때 여포군 합류

 

4. 연주에서 조조에게 패하여 진궁 세력과 여포군 합류

 

5. 여포가 서주를 점령한 뒤에 여포군 합류

 

총 다섯 사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난 마지막 사례인 여포가 서주에 있을 때

합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뒤에 따로 설명하겠음

 

다른 시기의 합류가 아닌 이유는

1.    고순에게선 병주 사람의 특징인 자기 생존이 우선인 모습이 없어

(자신이 패배할 거 같아 친척을 넘기는 위속저항없이 조조에게

항복한 장료패배하고도 살아남길 바라는 여포)

 

2.    제일 애매하긴 한데 이각에게 패배 후 잠시 원소의 용병 활동 했을 때

활약 했던 건 병주 출신인 성렴,위월(위속)등의 기병이 주력이기에 아닌 거 같고,

 

3.    하내 때 합류 했다면 학맹이 반란을 일으킬 때 같이 배반을 해야 맞지만

반대로 학명을 토벌을 하였으니 해당 되질 않고,

 

4.    조조에게 패배 후 진궁 등의 연주 세력이 였다면 고순과 진궁의 사이가

좋아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둘의 관계는 극악.

 

◈ 고순은 여포 합류 전 어디서 무얼 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선 기록이 전혀 없어 상상의 영역일 수 밖에 없는데

우선 기록을 살펴 보면

 

여름순욱정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에까지 이르렀다돌아오는 길에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가 유비와 함께 담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살륙한 곳이 많았다. – 무제기

 

조공(曹公-조조)이 서주를 정벌하자(194년의 일서주목 도겸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전해는 선주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 4천을 선주에게 보태어주자 마침내

전해를 떠나 도겸에 귀부했다도겸은 표를 올려 선주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별가 미축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주를 영접했으나 

선주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하비의 진등이 선주에게 말했다,

“지금 한실이 쇠퇴하고 천하가 뒤집어지려 하니공을 세우고 

대사를 이루는 것은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서주는 풍요롭고 호구가 백만이니부디 사군(유비)께서 뜻을 굽혀 이 주()를 맡아 주십시오.”

선주가 말했다,

“원공로(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소그는 45공의 명문이고 해내가 

그에게 귀부하고 있으니 가히 그에게 맡길 만하오.” – 선주전

 

서주 내 세력은 조표를 중심으로 한 단양병과

미축,진등을 중심으로 한 호족들로 나눠져 있고

누가 봐도 서주 호족은 유비에게 호의적인 걸 알 수 있는데

왜 유비는 원술에게 서주를 맡기라고 말을 했을까?

단순한 양해의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때 도겸이 병사하였으므로서주에서는 유비를 환영하였다유비는 가려고 했는데

진군이 충고의 말을 했다.

"원술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므로 지금 동쪽으로 간다면 반드시 그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여포가 만일 장군의 뒤를 습격한다면장군은 설령 서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일은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 진군전

 

유비도 진군에게서 조언을 들었기에 거절하기 위해선 자신을 대체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대체자로 원술을 뽑은 것.

그렇다는 건 서주 내에서도 원술을 원하는 무리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진등의 혀 드리블과 유명인인 공융의 추천으로 뽕에 취한 유비는 서주 간다)


그럼 유비가 아닌 원술을 원한 세력은 조표를 필두로 한 단양병일 수 밖에 없고

고순의 행적을 보면 친유비계가 아니기에 조표 휘하의 단양병일 가능성이 있다.

 

◈ 조표와 원술 그리고 여포와의 관계

 

선주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 조표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여포가 선주의 처자를 사로잡자 

선주는 군을 돌려 해서에 주둔했다. (8) – 선주전


( 8) [영웅기] –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군을 이끌고 

회음 석정에서 원술과 싸웠으나 이기고 짐을 되풀이했다도겸의 옛 장수인 조표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려 했다조표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면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敗走-패해서 달아남)했다

유비가 이 일을 듣고 군을 이끌고 되돌아왔는데하비에 도착하자 군사들이 궤주했다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서 광릉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유비가 동쪽으로 가서 원술을 공격하자 여포는 하비를 습격해 차지하고

유비가 되돌아가 여포에 귀의했다여포는 유비를 소패에 주둔하게 하고

서주자사를 자칭했다. - 여포전


(10) [영웅기] – (생략내가 태어난 이래 천하에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유비가 거병해 나와 더불어 싸웠소내가 장군의 위령에 힘입어 유비를 격파했으니 그 공이 세 번째요

장군은 내게 이 세 가지 큰 공을 세워주었으니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생사로 받들겠소

장군은 여러 해 동안 싸우느라 군량이 부족해 고통스럽다 하여 

이제 쌀 20만 곡을 보내니 도로에서 맞이해 주시오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응당 다시 끊이지 않게 보낼 것이오

만약 병기와 전구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크건 작건 오직 명하기 바라오.”

여포가 이 서신을 읽고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하비로 갔다.


[영웅기] – 여포가 물과 뭍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하비 서쪽 40리 되는 곳에 도착했다

유비의 중랑장 단양사람 허탐은 밤을 틈타 사마 장광을 여포에게로 보냈다그가 말했다,

“장익덕이 하비상 조표와 서로 다투어 익덕이 조표를 죽이니 

성중에 대란이 일어 서로 믿지 못합니다

단양병 천 명이 서쪽 백문성 안에 주둔하고 있는데 장군께서 

동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펄쩍 뛰며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군사들이 성 서문으로 향하면 단양군이 즉시 성문을 열어 

장군을 안으로 들여보낼 것입니다.”

이에 여포는 밤중에 진격하여 새벽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단양병이 성문을 열어 여포의 군사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포는 성문 위에 앉아 보병과 기병으로 불을 놓아 익덕의 군을 대파하고

유비의 처자식과 군자금부곡제장들의 가구를 노획했다.

 

기록에서 의문점이 발생하는데 원술은 여포에게 식량과 무기를 지원했을 뿐인데

분란을 미리 알았다는 식으로 하비로 이동한 점과


계급이 조표(하비상=태수급)보다 낮은 장비가 조표를 즉결 처분했다는 건 반역밖에 없는데

이 두가지 정황을 보면 알 듯 이미 조표는 이전부터 원술과의 내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고순이 단양병 출신으로 추측하는 이유

 

제일 중요한건 조표 생존 당시 기록이 없던 고순이 조표 사후부터 등장했다는 점과

조표를 죽인 장비를 막던 단양병의 수(함진영과 동일)와 장소도 의미 심장하기 때문이다.

우선 장비를 막던 백문성은 백문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훗날 여포의 친위 세력이 조조에게 항복할 때 최후의 방어 장소였으며

여포,진궁,고순이 처형 당한 장소이기도 하며 학맹의 반란에 대한 기록을 보면

 

건안 원년(196) 6밤중에 여포의 장수 하내인 학맹을 반란을 일으켜 군사들을 이끌고 

여포의 치소인 하비부로 쳐들어왔다청사의 합문 밖에 이르러 함께 함성을 지르며 합문을 공격했는데

문이 견고해 들어가지 못했다여포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누군지 몰랐기에 곧바로 부인을 이끌고 

과두단의(관을 쓰지 않은 맨머리에 옷을 갖춰 입지 못함)로 측간으로 들어가 벽을 밀어내고 빠져나갔고

도독 고순의 군영으로 가 고순의 군영 문을 곧바로 밀어젖히고 들어갔다고순이 말했다 (생략) – 여포전


내부 조력자로 인하여 학맹은 신속하게 관청을 공략하여 여포군을 와해 시켰는데

여포가 빤스런 후 고순에게 갔다는건

고순의 진영은 여포 진영과 별도로 존재했고 신속하게 여포의 처소로 진격하여 

반란을 진압했다는건 고순의 진영이 하비성 내부의 백문루 였을 가능성이 있다.

 

◈ 고순과 주변인들의 관계

 

여포와의 관계


[영웅기] – 고순은 사람됨이 청백(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궤유(선물)를 받지 않았다칠백 여 군사를 거느렸으나 천 명이라 일컬었는데개갑(갑옷), 

투구(싸움 도구)가 모두 정련정제하고 

매번 공격할 때마다 격파하지 못함이 없으니 함진영이라 불렀다


고순이 매번 여포에게 간언하길,

“무릇 집안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충신이나 밝고 지혜로운 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들이 쓰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거동하실 때 치밀히 생각하지 않고 

번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길 좋아하시니 그런 잘못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으나 능히 쓰지는 못했다


여포는 학맹의 반란을 진압한 후 다시 고순을 소원하게 대하고 

위속이 안팎의 친척이라 하여 고순이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다

그러다 싸움이 있게 되자 영을 내려 위속이 거느리던 군사를 고순이 이끌게 했는데 

고순은 또한 끝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 여포전

 

사람은 기본적으로 남을 배신하고 우리 편으로 붙으면 그 사람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는 것 

처럼 여포도 고순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둘의 개인적인 관계로 

주종관계를 맺은게 아니라

원술의 입김으로 유비를 배신을 한 상태에서 자신에게로 

넘어 왔기에 신용이 없었을 수 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고순이 제2의 학맹이 되지말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고순의 부대를 자신의 직속 부하 위속에게 포함 시켜 

관리하게 하여 반란을 방지한 거 같다.

(직속 부하가 배신할 걸 예측 못한 건 함정)

 

진궁과의 관계


여포는 진궁고순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태조의 양도(군량수송로)를 끊으려 했다여포의 처가 말했다,

“장군께서 친히 조공(曹公-조조)의 양도를 끊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진궁고순은 평소 서로 불화하니 장군께서 한번 나가시면 진궁고순은 필시 합심하여 

함께 성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만약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장군께서는 어디에서 자립하시겠습니까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어 진궁 등에 의해 그르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생략) – 여포전

 

고순과 진궁의 사이가 안좋은 건 둘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지 싶다


진궁의 경우

연주 출신으로 조조에게 패하여 도주하였으며 자신의 지지 세력도 박살났기에 

어떻게든 여포를 이용함으로써 다시 연주를 탈환해야하며 방해가 된다면 

여포마저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순의 경우

서주 출신이 맞다면 조조로부터 서주만 지키면 되기에 진궁과는 의견이 다를수 밖에 없다

또한 조표 휘하에 있었다면 조표와 함께 조조에게 탈리고 조조군의 강함을 알았기에 

여포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조조과의 관계


여포는 진궁고순 등과 함께 모두 효수(梟首)되어 허도로 보내졌고 그 뒤 매장되었다. – 여포전


조조는 여포의 수하 누구도 죽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능력만 있으면 인격적인 문제도 문제 삼지 않는

(무제기에서도 고순의 능력을 칭찬)

조조가 고순을 처형했다는건 여포의 부하인 후성,송헌,위속의 배신에도

백문루에서 조조에게 끝까지 저항하여 처형된게 아닐까 싶은데,

그만큼 고순에게 있어 조조는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였을까 싶다.


요약

1. 고순의 여포군 합류 시점은 서주 때로 추측

2. 고순은 조표 사후 등장하는걸 보면 조표 휘하의 단양병

3.여포의 장수중 고순만은 죽인거보면

조조를 상대로 끝까지 저항하면 싸움 아닐까 싶음


자료 출처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

댓글 작성 (0/1000) 비밀글 (체크하시면 운영자와 글 작성자만 볼 수 있습니다)

0개의 댓글과 0답글이 있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