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기계 안에는 풍화된 사람의 골격과 낡고 헤진 일기장이 세월을 잊은 듯 널브러져 있었다.
일기장은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필체로 작성되어 있었고, 그 친숙함에 이끌려 나는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일기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갔다.
일기장에는 앞으로 펼쳐질 피할 수 없는 인류 종말의 내용(소름끼칠 정도로 구체적인)과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는 이 남자의 처절한 사투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 자신은 패배했으나 이 일기를 읽는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휘갈긴 서명을 보고 나서야
그 서명은 나의 서명이며, 일기 또한 내 필체로 쓰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비현실적이고 악몽같은 현실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은 나에겐 이 모든걸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먼지가 가득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일기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일기를 참고한다면 어쩌면 내가 종말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헤진 가죽 시트에 몸을 앉히고 나는 일기에 적힌 방법대로 기계를 가동한다.
타임머신은 먼지를 토해내더니 이내 나를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의 과거로 날 데려간다.
'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라'
일그러지는 시공간 속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일기장의 첫 문장을 읊조리고 있었다.
댓글 작성 (0/1000) 비밀글 (체크하시면 운영자와 글 작성자만 볼 수 있습니다)